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가라타니 고진 (문단 편집) === 1980년 ===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1980), 『은유로서의 건축』(1983), 『반성과 역행』(1985), 『탐구Ⅰ』(1986), 『탐구II』(1989)를 발표했다. 이른바 구조주의와 포스트 구조주의의 이론적 음미와 마르크스 『자본론』의 가치형태론을 동시에 분석했다. 또한 『은유로서의 건축』(1995) 영어로 번역되어 간행되었다. 일본의 80년대 소비사회와 포스트모더니즘을 비판하고 「비평과 포스트 모던」(1985)과 함께 80년대를 풍미했다. 또한 「일본 근대 문학의 기원」이 간행되면서 예일대학 비교문학과 객원 연구원으로 이듬해에 미국에 체류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vDwc-x5MW10 | 테이프와 미디어를 활용해서, 자신의 사상을 소개하고 있다.]] 1984년에 와세다 대학에서 연구회의 강연인 「바흐친과 비트겐슈타인」를 발표했다. 1982년부터 와세다 대학에 재적하면서 당시 문학 연구회에 소속된 여러 사회학자들과 교류하며 가라타니 고진에게 영향을 받는다. 정작 이 당시에 가라타니는 『탐구』를 쓰기 이전부터 상당히 우울 했으며 비평적으로도 침묵을 유지했다. 1985년에 『내성과 역행』을 간행. 1987년에는 군상 신인 문학상에서 동상의 심사위원에 취임하고 1988년에 제 10회 노마문예 신인상에서 심사위원으로 취임한다. 1989년에는 횡단적인 비평 잡지인 『계간 사조』(1990)와 『비평 공간』(1991)을 창간하고 아사다 아키라와 함께 편집 위원을 맡았다. 아사다 아키라의 편집능력으로 당시에 이 잡지에 [[슬라보예 지젝]]을 일본에 처음으로 소개했다. 여기에는 에드워드 사이드, 프레드릭 제임슨과 같은 명망있는 비평가들도 포함되었다. 가라타니 고진은 90년대에 잡지를 중심으로 구조에서 실존, 그리고 개별성과 단독성, 일반과 보편성의 구분에 대한 논의를 [[칸트]]로부터 음미하기 시작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